미술관을 구경한 뒤 이중섭 거리를 쭉 따라 올라오다 보니
카페들이 여럿 보였다.
내가 가기로 마음 먹은 곳은 카페 메이비.


may 飛
외관도 아기자기 참 예쁘다.

여긴 홍시 음료가 맛있다던데 난 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걍 아메리카노.
커피 마시며 쓴 금액 정산하고 다시 출발.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음 숙소가 대정 쪽이라서 일단 모슬포 쪽으로 향했다.
가다가 마음 바뀌면 중문 쪽에 어디 한 곳에 들러도 좋고-
사실 가다가 내 나름의 추억의 장소인 쇠소깍을 들르든,
그 근처에서 엄청나게 맛있는 한라봉을 사먹었던 약천사를 들르든 할까 싶기도 했다.
근데 막상 운전하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려서 그냥 바로 모슬포로 가서 해넘이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모슬포항 근처에 도착해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근처 하모해수욕장으로 ㄱㄱ.
예전에 친구들과 놀러왔을 때 돔베낭골에서 낙조를 봤던 게 참 인상 깊었어서
나 혼자서라도 해넘이를 꼭 보고싶었다.
시간이 좀 남아 하모 해수욕장 부근을 돌며 어디에 차를 대야 경관이 예쁠까 탐색하다가
방파제 부근으로 마음을 정했다.
사실 안쪽 공터로 들어가면 방파제에 가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데
방파제 입구에 차를 세우면 딱 좋겠다 싶었다.
다행히 정말 차가 단 한 대도 없고 오가는 차도 없어서,
입구에 차를 살짝 비껴대고 정면으로 해가 보이게 주차했다.
혹시라도 누가 온다면 당장 차를 뺄 수 있게 준비는 해두었지만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딱 한 대의 트럭만이, 그것도 내가 비킬 필요도 없이 지나가서 내 옆으로 차를 대고는
주인 아저씨가 강아지와 함께 가볍게 산책 후 다시 떠나셨다.
슬슬 해가 넘어갈 기미가 보이고 약간 어둑해질 무렵,
음악은 성시경 리메이크 앨범이 나오고 있었다.
BGM: 성시경 - 어떤 그리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음악과 내 눈 앞에 아스라히 펼쳐진 풍경과
사람 하나 없는 적막, 고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내게는 너무 벅차올랐다.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수평선에 낀 구름 탓에 수평선을 넘어 가는 장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조차도 이 순간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참 외롭지만 내가 선택한 외로움이 묘하게 뿌듯한 느낌이랄까.
그 자리를 떠나기가 무척 아쉬웠다.

바닷가에서
-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아름다워 또다시 차를 길가에 멈추고 한 컷-
해넘이의 울림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점심으로 전복죽을 먹었기 때문인지 배가 고파왔다.
갈치회도 먹고싶고 돔베고기도 먹고싶지만, 다 혼자서는 먹을 수 없는 것들... ㅠㅠ
보말 칼국수를 먹으러 옥돔식당으로 갔다.
거리가 엄청 가까워 차로 5분 정도?
하지만......
닫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게스트 하우스 사장언니 말로는 여긴 한 네 시 정도면 닫는다고...
세시 반 이렇게 닫기도 하신다고 ㅠㅠ
그래서 일단 게스트 하우스 근처로 가서 식사해야겠다 싶어 '수아네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네비게이션에서 설마 이 길로 가라는 게 맞는 건가 싶은 길들을 통과해서 도착..
다행히 여긴 영업 중 ㅠㅠㅠㅠㅠㅠㅠㅠ
손님이 나 뿐이라, 들어가니 할머니도 안 계시고 할아버지 뿐이셔서 나가라고 할까봐 쫄았지만 다행히-
차림표 ㅋㅋㅋ
자투리 구이도 1인분만은 나오지 않는다 하셔서 ㅠㅠ
오분작 뚝배기로 부탁드렸다.
제주에 와서 갈치도 못 먹고 흑돼지구이도 못 먹는데 오분자기 뚝배기라도 먹고 가야지!
이렇게나 푸짐하게 나오는 밑반찬 +_+
진짜 우리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것 같은 식당이었다.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연세가 많으셔서
서울의 큰 식당들 같은 청결함을 기대한다면 그냥 다른 규모있는 식당으로 가길 권한다.
나도 좀 까탈스런 편이긴 한데 그래도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 같아서 정말 잘 먹었음.
반찬도 다 맛깔스럽고 할머니도 참 좋으신 분이다.
오분자기는 아래 깔려 보이지 않는 오분작 뚝배기 ㅋㅋㅋ
국물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저 소라는 (사실 난 소라를 잘 안 먹는 편인데..) 할머니가 빼기 힘들 거라며
직접 옆에 와서 빼주셔서 남김없이 다 먹었다 ㅋㅋㅋ
오분자기도 탱탱한 놈으로 두 개나 들어있고.
밥이며 반찬이며 양이 진짜 많았는데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할머니 때문에
정말 열심히 남김 없이 다 먹었다. ㅋㅋㅋ
근데 나는 이렇게 맛난 밥 차려주시고 정작 할머니는 요즘 영 입맛이 없으시다며
할아버지와 컵라면을 드시는 거다. ㅠㅠ
매운 것도 속아파 못 드신다고, 사리곰탕면을.
나 챙겨주신다고 다 불어터질 것 같은데 그걸 식사로 하고 계셔서 좀 죄송하기도 하고,
맨날 "나 이거 안 먹고 싶어~" 하시는 우리 외할머니 생각도 나고.
자꾸 외할머니 생각나서 더 열심히 먹었다. ㅋㅋㅋ
그리고 이렇게 한 줌 귤도 갖다주시고.
한 개는 내가 이미 홀랑 까먹어 버린 후-
뒤에 두 개는 되게 컸다 오렌지마냥.
결국 여행하며 다 먹지 못해서 집에 가져왔는데, 오렌지 같았던 큰 귤은 정말 달았다.
왜 혼자 다니냐며, 남자친구 어쩌고 혼자 왔느냐고 걱정해주시던 할머니. ㅎㅎ
다음엔 꼭 남자친구랑 같이 오라고 신신당부하시던 할머니.
다음에 가게 되면 우리가 먹는 맛난 케익 같은 거 좀 사다드리고 싶다.
부드럽고 달달한 티라미수 같은 거.
그리고 수아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늘 묵을 숙소인
더 파프리카 게스트 하우스가 위치하고 있었다.
여긴 세 군데 게스트 하우스 중에 그나마 가장 쉽게 찾았음.. ㅋㅋㅋㅋ


더 파프리카 게스트 하우스.
1인실은 2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나는 3만원, 하나는 4만원.
내가 묵은 이 방이 4만원이다. 꽤 크다.
4만원에 조식 포함.
방마다 개별난방은 되지 않지만 침대에 전기장판이 깔려있어 따뜻하게 잘 잤다.
사장님이 서울에서 오신 언니라 센스있게 각종 용품들 구비되어 있음.
심지어 클렌징 오일과 클렌징 폼도 따로 갖춰져 있었다.
샤워실에도 세면대에도.
미리 수건 2개를 주셔서 그것도 좋았고.
책 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게 너무 아쉬웠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다른 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잠깐 담소도 나누고.
내일 뭐할지 조언도 좀 듣고.
장기투숙은 원래 안 받는다고 하셨는데, 회사일로 장기 출장 중이신 분들이 계셔서
그 분들은 당분간 길게 묵고 계신다고.
아빠뻘인 분과 삼촌뻘인 분이셨는데 두 분 다 센스있고 유쾌하신 분들이라 재밌었다.

귀여운 곰돌이!
아쉬운 게 들어갈 땐 어두워서, 나올 땐 비가 와서 외관 사진이 없다.
여기 참 좋았는데.
3일 동안 묵은 게스트 하우스 모두 깨끗하고 친절하고 좋았지만,
나중에 가장 다시 오고 싶은 곳은 여기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음 ㅋㅋㅋ 편해서 그런가.



덧글
2014/02/20 12:19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2014/02/22 22:13 #
비공개 답글입니다.